- 수납장 - 양문, 슬라이딩. 겉면 모두 거울, 내부에 가로/세로로 봉이 있음. 세면대 옆쪽칸에 2구콘센트 추가
- 화장지 걸이 : 위에 받침대 있는 모델 (벽속에 넣을 수 있으면 제일 좋음)
가구
- 전실 붙박이장 : 화분 오픈박스 길게(가로 꽉채워), 세로 총높이는 40cm 이상, 화분을 가리는 높이(약 12cm)의 칸막이 추가 - 신발장 붙박이장 : 오픈박스의 가로는 중간 몇칸만 (예: 총 6칸 중 4칸) - 전실 붙박이장 : 좌측 하부장 속에 2구 콘센트 추가 - 전실 붙박이장 : 등 상시 On 스위치를 추가 (벽면에 설치 불가하면, 장 안쪽(좌측 상부장)에 설치) - 현관의 신발장 : 좌측간에 큰 청소기 수납공간과 그 공간에 2구콘센트 추가, 신발장의 칸 높이 조절이 어느정도 되도록. - 씽크대 아래 난방분배기 가림판 설치 - 주방 가구에 전자레인지와 밥솥 칸 - 아일랜드 식탁 : 인덕션 2구, 한쪽은 수납, 반대쪽은 의자 놓을 수 있게. - 안방 침실 옷장 : 긴 옷 칸 많이 준비(원피스, 코트 용) <- 옷장 내부의 구조를 미리 보고 싶음 *** - 침실2,3,4,5의 붙박이장 : 한쪽 문(침실도어 쪽) 외부(전체높이)에 거울 부착 : 아래그림은 한샘(같은 아파트 사례)
- 드레스품 양문도어 중 좌측(안방쪽) 도어 바깥면에 전체 거울 부착. - 화장대: 왼쪽 바깥장에 가방 수납칸, 상부장 좌우 포함하여 모두 거울, 화장대 상부 노출위치에 2구콘센트
- 신발장 건너편 벤치장 : 윗면에 쿠션(의자처럼), 아래에 수납장(양문도어) - 통신분배함 : 주방 우측벽쪽에 있어서 붙박이장 위치와 겹치므로, 분배함을 사용할 수 있도록 붙박이장의 뒷면 일부를 개방해야 함. - 신발장 건너편벽에 큰 거울 부착 : 두꺼비집 경계선부터 시작하여 우측으로 최대한 넓게 - 가구 색상 : 전체적으로 흰색계열(아이보리? 이룸사무실에서 결정했음), 신발장 건너편 벤치장은 나무색 - 오픈박스 색상 : 전실 화분장의 오픈박스는 흰색계열(장과 동일색상), 신발장의 오픈박스는 나무색
- 아치, 스윙폴딩도어, 상부 투명유리, 하부 모루, 흰색계열 - 오른쪽 작은 문(동선 위해) 필요 여부 확인요
바닥
- 신발장 디딤석 : 기존의 위치처럼
벽지
- 침실5(현관방) : 전체벽 라이트 그린색 (한샘 15119-6 참고) <- 변경사항
- 서재방 : 한쪽만 하늘색 : 협의 완료 - 다른 방들 : 흰색 계열 (매장에서 선정 완료) ====================================== 10/1 미팅(전기: 오성전기조명) - 전기 자재 미팅 했음. 10/7 확인 및 보완할 사항 샷시 - 우레탄 충전 보완 필요(단열 목적) : 샷시와 벽사이에 우레탄이 꽉 충전되지 않은 곳이 많음. 전체 점검 필요 (아래 사진참고) - 침실 5 : 샷시 위쪽 보강대 없음(자석 안 붙음). 4개 창 모두 - 침실 3 쪽 베란다 : 외부샷시 좌우 작은창 2개의 윗쪽 보강대 없음 - 주방 : 실내 샷시 좌우 문 윗쪽 보강대 없음 - 안방 : 창문 3개 모두 위아래 보강대 없음, 세로측 보강재 길이도 짧음(특히 오른쪽 바깥 창 오른쪽 위) - 서재방 : 좌우 창문 위아래 보강대 없음 - 방충망 추락방지캡 설치 부탁 : 주방 베란다 외부와 서재방의 방충망에 : 거실베란다와 달리 안전바가 없어서 - 질문 : 방충망에는 보강대가 들어가 있나요?
10/8 미팅(타일,도기: 현대타일) 때 안건 - 씽크대 하부에 장착할 음식물분쇄기와 절수기는 모델 파악하여 사전 공유 예정 - 주방 천장 누수 건은 이젠 문제없어 보이는지?
10/10 미팅(가구: 한샘(현장)) 때 안건 - 씽크대 하부에 장착할 음식물분쇄기와 절수기는 모델 파악하여 사전 공유 예정 - 벽면 곰팡이를 제거후 작업 바람 : 곰팡이 있는 곳은, 1.안방 베란다 끝쪽(제일심함), 2.주방 베란다, 3.서재방 확장한 곳
My) 10/10 현장 확인할 사항 - 샷시 0) 사진 다 찍기 1.1) 방충망 보강대가 들어가 있는지? <- 확인위해 자석 필요 1.2) 싱크대 방충망? 있나? -> 알루미늄? 2) 외부 코킹 3) 폼 다시 잘 충전?
추가 점검사항 - 실링팬 옆 조명은 날개와 겹치지 않게 많이 떨어뜨려야 함 : 특히 안방은 실링팬 날개가 거실처럼 긴 모델임에 주의
權泳基(권영기·59) 2군사령관(육군 대장)이 2006년 11월17일 40년의 軍생활을 마감하고 전역했다. 權대장의 전역은 한 군인의 전역이 아니라, 6·25 전쟁 이후 56년의 전통을 이어온 갑종간부 시대를 마감하는 「사건」이었다. 權장군은 현역으로 남아 있던 마지막 「갑종간부」 출신 장교였다.
權장군은 진주高를 졸업한 후 병사로 복무하다 1968년 갑종간부 222기로 임관했으며, 1970~1971년 중위로 베트남戰에 참전했다. 權장군은 1968년 7월 소위로 임관해 金寬鎭(김관진ㆍ육사 28기) 합참의장보다 임관이 4년 빠른 육군 최고참이었다. 갑종간부 후보생 과정은 1950년 1월 육군보병학교에 설치돼 한국전쟁 직후인 같은 해 7월15일 1기 363명이 처음으로 임관한 후, 1969년 230기까지 4만5424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전역 직후 기자와 만난 權장군은 『국가를 위해 40년의 봉사기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 명예롭고 은혜로운 일』이라며 『훌륭한 선배들이 많이 계신데도 불구하고, 마지막 전역자이기 때문에 주목받는다는 게 솔직히 부담스럽다』고 했다.
權泳基 예비역 대장은 갑종장교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대한민국이 가장 힘들었던 시절 전선을 지킨 소대장·중대장들』이라고 했다. 그는 『소대장으로 참전했던 베트남전쟁이 40년 軍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갑종장교 출신들이 보직과 진급에서 차별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음에도 불구, 대장까지 진급하셨다」고 하자, 權장군은 『부하·동료·상관들이 모두 도와준 덕분』이라고 했다.
『베트남 전쟁을 통해 힘 없는 나라가 전쟁을 겪을 때 어떤 수모를 겪는지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낮에는 한국군과 미군의 통제로 치안이 유지됐지만, 밤이 되면 무법천지가 됐습니다. 敵(적)들이 民家(민가)로 내려와 여자를 납치하고, 식량을 탈취했습니다.
힘이 없는 나라가 되면, 外侵(외침)을 당했을 때 국민들이 짐승 취급을 당합니다. 분단국가 한국도 주변 4강 틈바구니에서 힘을 기르지 않으면 그런 일이 안 생기란 법이 없습니다. 세계화 시대에 軍도 세계 속에서 경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각자의 계급과 직책에 상응하는 전문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1期는 임관 전에 한국전쟁 참전
1950년 7월15일 임관한 갑종간부 1기 후보생들은 임관하기도 전에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갑종장교 출신 예비역 장성 중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소대장을 맡고, 베트남전쟁 당시 대대장·중대장을 맡은 사람이 많았다. 갑종 1기생으로 11~12代 국회의원을 지낸 柳根桓(유근환·77·예비역 소장) 국제한자진흥협의회 이사장의 회고다.
『육군보병학교에서 두 달 교육받고 있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습니다. 당시 일부는 汶山(문산)으로 출동했고, 저와 같은 신입들은 다음날(6월26일) 새벽 김포로 출발했어요. 차가 없어서 민간 버스를 모두 징발해 이동했습니다. 총이랑 다른 장비들도 없어서 부평에 있던 옛 일본군 兵倉(병창)에서 구식 소총을 들고 갔습니다.
전쟁이 터졌다고 하지만, 실제 전투 경험은 전무했기 때문에 동기들 중에서는 「전쟁이 터졌으니 이제 밥은 실컷 먹겠구나」라며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보병학교 급식이 좋지 않았으니까요.
막상 김포 전선에 나가 보니, 지옥 같았습니다. 우리는 박격포밖에 없었는데 북한군은 105mm 대포를 쏘아댔습니다. 지휘관이 「포 없이 어떻게 전쟁하겠냐」고 신경질 내는 소리도 들었어요. 머리 위로 「슝~슝」 포탄 날아가는 소리가 정신없이 들렸습니다. 그 소리에 동기생 하나가 미쳤어요. 막 소리를 지르고 뒹굴다가 결국 후방으로 끌려갔어요. 탱크가 밀려오기 시작하니, 그날 밤이 돼서야 철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康承宇(강승우·갑종장교 7기) 소위는 육군 9사단 30연대 1중대 3소대장이었다. 1952년 10월12일, 康소위는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의 한 야산에서 전사했다. 이 야산을 사람들은 「백마고지」라 불렀다.
康소위는 백마고지 전투 중 그의 소대원들이 敵의 기관총에 맞아 목숨을 잃는 장면을 눈앞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적진을 점령하기 위해 敵의 기관총을 무력화할 필요가 있었다. 소대가 갖고 있던 장비는 소총과 수류탄이 전부였다.
康소위는 소대원 두 명을 이끌고 수류탄 안전핀을 뽑아든 채 기관총 진지로 돌격했다. 이들 「육탄 3용사」의 활약에 힘입어 9사단은 이날 오후 1시경, 백마고지를 탈환했다. 정부는 康소위에게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追敍(추서)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전시실에는 康承宇 소위를 비롯한 육탄 3용사의 동상이 전시돼 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갑종장교 수는 1만508명. 한국전쟁에 참전한 장교 총 3만2970명 중 32%에 달한다. 이들 참전 갑종장교 중 805명이 전사했다.
『갑종장교라고 군번을 바꿔 버리다니』
河小坤(하소곤·79) 예비역 소장은 폐 한 쪽이 없다. 1979년 12월12일,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이었던 河소장은 신군부의 鄭昇和(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강제연행을 저지하다 헌병 대위가 쏜 총탄에 가슴을 맞았다. 그는 『총탄이 관통하는 순간 가슴이 뜨겁고, 다리에 힘이 풀리고, 정신이 흐릿해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河장군은 갑종장교 1기로 임관, 갑종장교 중 최초로 별을 단 인물이다. 그는 갑종장교단의 모임을 조직했고, 4만5000여 명 갑종장교들을 한데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河장군은 『동기생 60명이 국립묘지에 묻혔다』고 했다. 그는 『갑종장교에 대한 차별은 말할 수 없이 심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河장군은 『군인은 軍番(군번), 계급, 이름순으로 말한다』면서 『가장 중요한 갑종장교의 군번을 바꿔 버린 것은 姓(성)을 갈아 버린 것보다 더 지독했다』고 했다.
『제 군번은 171××이었습니다. 연대장 시절인 1969년, 갑종 출신들은 군번 앞에 1을 하나 더 붙이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군번이 1171××가 되는 겁니다. 순간 모욕을 느껴 육군본부를 찾아가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당시 육군본부 인사관리처 全斗煥(전두환) 소령이 육사 출신을 우대하기 위해 만든 제도라고 하더군요. 죽은 동기들 비석에 있는 군번은 어떻게 되는 건지 답답했습니다. 다른 차별로 인한 서러움이야 모두 이겨낼 수 있다고 해도, 군번을 바꾼 건 정말 뼈아프게 서러웠습니다』
河小坤 장군은 준장 진급 이후 현역 갑종장교들을 모아 「갑종전우회」를 조직했다. 당시 현역 갑종장교들은 軍 내부에서의 심한 차별로 인해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 河小坤 장군은 7사단장, 1군 사령부 참모장 등을 거쳐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전역했다. 河小坤 장군은 한쪽 폐로 호흡이 힘겨운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우리는 국가에 헌신했다』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200여 명의 장군 배출
갑종전우회 관계자들은 『육군 내에서 갑종장교에 대한 차별은 분명히 존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갑종장교단은 吳滋福(오자복·76·갑종 3기), 曺永吉(조영길·66·갑종 172기) 前 국방부 장관을 비롯, 200여 명의 장군을 배출했다. 6·25 전쟁을 비롯, 베트남戰·對간첩작전 등 수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태극무공훈장 3명을 포함해 5342명이 무공훈장을 받았다.
曺永吉 前 국방장관은 『갑종장교들의 희생을 기억해 달라』고 했다.
『한국전쟁 초기부터 갑종장교들은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이들의 희생이 나라를 구하는 데 기여한 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은 없습니다. 갑종장교라는 출신의 한계 때문에 능력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자기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한 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우리 軍이 創軍(창군)하고 발전하는 동안, 갑종장교단이 軍의 허리 역할을 하며 이룩한 공로는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베트남전쟁 영웅 林東春 대위
육군보병학교에 세워진 故 林東春 대위의 동상
베트남戰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1972년 4월의 「안케패스(안케 지역의 고개)」 전투를 기억한다. 안케전투의 영웅 故 林東春(임동춘·갑종장교 230기) 대위는 수도사단 기갑연대 2중대 1소대장이었다. 베트남 안케고개 638고지에서 林東春 대위와 소대원들은 수류탄으로 싸웠다. 林東春 대위는 전투 중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피를 흘리고 다리를 절룩거리며 그는 계속 수류탄을 적진으로 날렸다. 敵의 벙커 다섯 개가 폭파됐다. 점령이 불가능해 보였던 안케고개의 638고지는 이렇게 점령됐다.
안케패스 전투에서 林東春 대위는 전사했다. 정부는 林東春 대위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그의 모교인 전남 장성의 육군보병학교에는 지금도 「동춘관」이 있다. 동춘관 바로 앞에는 林東春 대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베트남戰에 참전한 갑종장교 수는 1만4712명으로 전체 참전 장교 2만2403명의 65.7%를 차지했다. 이 중 174명이 베트남에서 전사했다. 육군은 매년 군단급 1명씩 총 14명의 모범 소대장을 선발해 「東春賞(동춘상)」을 시상한다.
金石元(김석원·66·갑종 166기) 전쟁기념관장 역시 갑종장교 출신이다. 金石元 전쟁기념관장은 갑종장교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갑종장교들은 험난한 시대에 태어나서 육군의 핵심 전력을 이룬 사람들』이라면서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게 솔직히 섭섭하다』고 했다.
1998년 군수사령관을 마지막으로 전역한 金石元 장군은 기갑연대 3대대 작전장교로 베트남戰에 참전했다. 365일 내내 작전을 해본 경험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베트남전쟁을 치를 때, 주위에 갑종 장교가 정말 많았습니다. 우리 대대는 중대장 4명 중 3명이 갑종장교였고, 소대장 인원 역시 4분의 3이 갑종장교 출신이었습니다. 높은 계급으로 올라갈수록 갑종장교 수는 줄어들었지만, 초급장교들인 소대장·중대장 중에서는 갑종 장교 수가 절대적으로 많아 갑종장교들이 베트남戰을 치른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습니다.
베트남戰에서 작전은 모두 헬기로 합니다. 베트남戰에서 M16 소총을 처음 만져 봤습니다. 전쟁을 대부분 미군이 지원한 음식·화기·장비·이동수단으로 했습니다. 베트남戰을 통해 우리의 전투력이 한 단계 상승하게 된 것도, 미군과 공동작전을 펼치면서 경험을 쌓은 겁니다. 이때 갑종장교들이 초급장교로서 익힌 전술은 한국軍 발전에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갑종장교단중앙회 朴熹模(박희모·74·예비역 중장·갑종 9기) 회장은 베트남戰에 대대장으로 참전했다. 칠순을 넘긴 노병은 정정했다. 180cm 넘는 큰 키에 여전히 허리도 꼿꼿했고,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그는 보성高 2학년 재학 중 갑종장교로 선발돼 소위로 임관했다.
『월급 받으려고 전선에 간 것 아니다』
故 송서규 대령의 안장식에서. 당시 김계원 육군참모총장이 故 송서규 대령의 부인 품에 안긴 아들 재용군에게 태극무공훈장을 걸어 주고 있다.
『우리는 어떤 보상을 위해 전선에 나간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해야만 했고, 그래서 우리가 한 것입니다. 그때 소위 임관하면 월급이 2만환이었습니다. 치약 하나 살 수 있는 돈이었어요. 그 돈 받겠다고 전선으로 뛰어들었겠습니까. 돌이켜 보면 갑종장교제도는 무모한 제도였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땐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전선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노장은 목소리를 높였다.
『전쟁이 나면 방어할 수 있는 국가가 제대로 된 국가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은 제대로 된 국가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전쟁이 났는데, 최전방에서 소대를 이끌 소대장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갑종장교가 그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죽었습니다. 우리가 한국전쟁에서 실제 전투를 사실상 도맡아 했습니다.
전쟁이 나기 전까지 육군 장교 중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터지면서 고등교육을 받은 인원이 대량 입대했고, 그것이 짧은 시간 동안 軍이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朴熹模 예비역 중장은 대위 시절 육군보병학교 교관을 지냈다. 당시 육사 11기가 보병학교에 입교했다. 육사 11기에는 全斗煥·盧泰愚(노태우) 대통령이 속해 있었다.
朴熹模 장군은 최근 軍의 교육훈련과 정신전력 약화를 우려했다.
『현재 軍 장병들은 실전 훈련을 지금보다 더 강도 높게 해야 합니다. 총도 여러 번 쏘아 봐야 사고가 안 나는 법입니다. 자살이 두려워 군인에게 실탄을 주지 못한다는 말을 세계 어느 곳에 가서 할 수 있겠습니까. 육군참모총장의 임무는 전투 지휘가 아니라, 장병들의 훈련을 위한 충분한 물량 공급을 책임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961년, 육군보병학교 교육생 복장.
육사 출신과의 경쟁
나사렛대학교 부동산학과 尹皇地(윤황지·65·갑종 165기·예비역 육군 중령) 교수는 베트남전쟁 당시 작전과 대위로 근무했다. 그는 『육사 출신들에게 뒤지기 싫어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면서 『사회에 나와서 육사 출신 장교들을 만나 「갑종장교들이 육사 출신보다 10배는 더 노력하는 장교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 뿌듯했다』고 했다.
2006년 11월6일, 제주도 제주시 충혼묘지 입구에서 故 송서규 대령의 39주기 추모식이 있었다. 이날 행사에는 金泰煥(김태환) 제주지사를 비롯 송서규 대령의 부인 허록(74) 여사, 朴熹模 갑종장교단중앙회장 등이 참석했다.
전몰 갑종장교 추모식에 국방장관 不參
2006년 10월 육군보병학교에서 열린 전몰 갑종장교 영령 추모제.
갑종장교 7기로 임관한 송서규 대령은 베트남戰의 영웅이었다. 송서규 중령은 육군 백마부대 대대장으로 베트남戰에 참전했다. 그는 베트남 닌호아 전투 최전방에서 직접 중대를 지휘했다. 3소대장이 전사하자 송서규 중령은 3소대를 직접 지휘했다. 그는 사병의 유탄 발사기를 들고 진격했다. 敵들은 30m 전방의 농가에 숨어 총을 쏘아 댔다.
송서규 중령은 가슴에 敵의 총알이 박혔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1967년 11월6일, 그의 귀국 이틀 전이었다.
정부는 故 송서규 중령에게 1계급 특진과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1967년 12월 치러진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식에서 당시 金桂元(김계원) 육군참모총장은 故 송서규 대령의 부인 허록 여사 품에 안긴 아들 재용군(당시 네 살)의 목에 태극무공훈장을 걸어 주었다.
2006년 10월13일, 전남 장성의 육군보병학교內 동춘관 앞에서는 「전몰 갑종장교 영령 추모제」 행사가 거행됐다. 한국전쟁·베트남전쟁 등 대한민국이 가장 힘들었던 시대에 전쟁터에서 전사한 984명의 갑종장교들을 위해, 참석자들은 고개를 숙여 묵념했다. 이날, 당시 尹光雄(윤광웅) 국방부 장관은 참석하지 않았다.
동춘관 앞에는 베트남전쟁의 영웅 林東春 대위 동상과 함께 갑종장교 호국탑이 세워져 있다. 호국탑에는 「싸워 이겼노라」라는 문구와 함께 이렇게 쓰여 있다. 「나라를 위하여」. 현역 갑종장교는 이제 한 명도 남지 않았다.●
▣ 갑종장교란?
1960년대 육군보병학교의 야외교육 장면.
갑종장교는 부족한 장교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만들어진 간부 후보생 과정이었다. 급조된 갑종장교 출신들은 전선 곳곳에 배치됐다. 「甲種(갑종)」은 으뜸, 軍 용어로 「A급」을 의미한다고 한다. 광복 직후 사라지지 않았던 일본군式 용어다. 일본군 편제에서 갑종은 장교를, 을종은 부사관을 의미했다.
갑종간부 후보생 과정은 고졸 학력 이상의 20세 이상 남자를 대상으로 1950년 1월 육군 보병학교에 설치됐다. 갑종장교는 민간인이나 현역 부사관 지원자 중에서 필기 시험과 지휘관의 추천을 통해 선발됐다. 1950년 1월 갑종간부 후보생 선발시험은 영등포 서울공업고등학교에서 실시됐다.
선발된 갑종장교 후보생들은 경기도 시흥의 육군보병학교에서 24주간의 장교 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했다. 6·25 전쟁 발발 직후인 7월, 1기생 387명이 배출됐다. 갑종장교 1기와 2기는 훈련을 다 마치기도 전에 한국전쟁을 맞았다. 갑종간부 후보생들은 계급장 대신 「士」자를 달고 전선을 넘나들었다. 이들은 김포·문산·과천 전투에서 소대장으로 활동했다.
1969년까지 20년간 배출된 갑종장교 수는 230기까지 4만5424명이다. 1969년, 육군본부는 전체 장교의 수준을 고졸 학력에서 대졸 학력으로 더 높이겠다는 취지로 갑종간부 후보생 제도를 폐지하고 1970년 3사관학교를 설립했다.
이제 軍이 어느 정도 위치에 올랐고, ROTC의 활성화 등으로 장교 양성 프로그램이 다양해진 것도 갑종장교 폐지의 한 이유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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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컬 프린터 추가 연결방법은 해당 프린터 또는 복사기 IP를 직접 입력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새포트 만들기]를 선택해 주고 선택 목록에서 [Standard TCP/IP Port]를 선택해 준 다음 아래에 있는 [다음] 버튼을 클릭해 줍니다.
이제 해당 프린터 IP 주소를 [호스트 이름 또는 IP주소]란에 입력해 줍니다. 주소를 입력해 줄 때 포트 이름에 자동으로 해당 아이피 주소가 입력되는데요. 포트 이름은 따로 변경을 안하는 것이 경험상 좋습니다. 왜냐하면 문제가 생겼을 때 기본정보에서 확인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프린터 드라이버를 설치하는데요 제조업체를 선택한 후 프린터 목록에서 모델을 찾아 선택해 줍니다. 저희 사무실은 신도리코 제품을 사용하는데 제조업체 이름이 Ricoh로 되어 있더라고요.
만약 제품이 없을 경우에는 제조업체에서 해당 모델의 드라이버를 다운 받아서 설치하거나 [디스크 있음]을 클릭하여 드라이버를 주소를 연결해 줍니다.
프린터 이름을 입력해 주는데요. 한글로 입력하셔도 되지만 영문과 숫자로 주시는 좋습니다. 한글로 했다가 오류나는 경험이 있어서 저는 한글 이름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프린터 공유 설정 부분이 나타나는데요. 여기서는 [공유 안 함]을 선택해 줍니다.
기본 프린터로 설정 할 것인지 묻는 메세지가 나오는데요. 만약 잠깐 필요해서 연결을 하는 것이라면 체크를 해제하시고 계속해서 연결하여 기본으로 사용하실 때에는 그냥 두시면 됩니다. 그리고 [마침]을 클릭합니다.
벌집 모양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다고 해서 속칭 '벌집촌'으로 불리는 구로구 일대 쪽방촌. 방한칸과 부엌을 합쳐 3-4평에 불과한 이 공간에서 2-4명 가량이 살고 있다.
[출처] 낮은울타리 1991년 5월호
[설명]
위 '용욱이의 편지글'은 1991년 5월호에 기독교 잡지 '낮은울타리'에 최초로 실렸다.
이 글은 '난 못죽어 인제'라는 제목으로 실렸는데, 당시만 해도 창간된 지 얼마 안되었던 이 잡지에 실린 용욱 군의 글은 큰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던 1999년 1월 '낮은 울타리' 편집국은 100호특집 기념으로 그 동안 실렸던 글 중 좋은 글을 선별해 특집호에 실었고, '난 못죽어 인제'도 그에 포함됐다.
이후 2001년경 위 글은 '용욱이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을 통해 이슈화되면서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고,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훈화시간'에 위 글을 들은 한 초등 여학생이 만원짜리 한장과 5천원짜리 문화상품권을 구로초등학교에 보내기도 했다.
1999년 특집호에 용욱이의 편지를 게재했던 <낮은울타리>의 서정희 편집국 차장은 "10년 전에 편집국에서 일했던 직원은 현재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아 어떤 경위로 1991년에 그 글이 실렸는지 알수 없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