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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Old but Goodies - 엘비라 마디간

 

 

글_ 서남준 | 음악평론가


햇볕이 춤을 추는 녹색의 들판에서 한 쌍의 남녀가 뛰놀고 있다. 남자는 스웨덴의 귀족이자 육군 중위인 식스텐 스파레 백작, 여자는 서커스단에서 도망친 엘비라 마디간이다. 식스틴 스파레 백작은 처자가 있는 몸이면서도 서커스단에서 줄을 타는 비천한 신분의 아가씨 엘비라 마디간과 사랑에 빠져 세상의 눈을 피해 정처없는 사랑의 도피행에 나선 신세다.

두 사람의 사련(邪戀)은 연일 신문을 떠들썩하게 만들었고 세상 사람들의 주목거리였다. 그러나 식스텐은 해맑은 눈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엘비라와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고 더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낀다. 그들은 도시를 떠나 마치 어린아이들처럼 깔깔 거리면서 깨끗하고 넓은 들판에서 나비를 쫓아 다니고, 잔디에 딩굴면서 가물거리는 아지랑이와 바람결에 눕는 보리밭을 그윽한 눈길로 바라보곤 한다.


흰 드레스를 입은 엘비라는 나무에 줄을 매고 공중에서 줄을 탄다. 마치 나비처럼 너울 너울 춤을 춘다. 그 모습이 참으로 아름답다. 이름 모를 새들이 지저귀는 소리, 벌레들의 울음소리, 나뭇잎이 바람결에 스치는 소리, 이런 자연의 생명에 리듬을 맞추기라도 하듯이 모짜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 21번 다장조 K. 467의 제 2악장 안단테가 조용히 흘러 나온다. 그 멜로디의 흐름을 따라 꽃들은 화사하게 피어 오르고 찬란한 녹음은 더욱 짙어지면서 햇볕은 순결하게 빛난다.

그 속으로 안단테 악장이 마치 부드러운 파도처럼 감미롭게 흘러 간다. 그토록 순수하고 그토록 시적인 선율이라니.

모짜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 21번으로 보다는 `엘비라 마디간`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널리 알려진 이 곡은 영화에서 식스텐과 엘비라의 사랑의 기쁨을 상징하는 테마로 주로 전반에 쓰여지고 있고, 후반의 고통스러운 도피 장면에서는 거의 들리지 않다가 두 연인의 슬픈 정사 직전에 마치 탄식하듯 희미하게 흘러 나온다. 아마도 스웨덴의 자연주의 감독 보 비델베르그의 영화 `엘비라 마디간 `(Elvira Madigan)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 영화의 테마로 흘러 나온 모짜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 21번 다장조 제2악장 안단테를 잊지 못하고 있으리라.

모짜르트는 모두 27편의 피아노 협주곡을 썼지만 그 중에사도 제 21번 다장조는 아름다운 서정으로 유명한 가요악장 안단테로 인해 모짜르트의 전(全)작품 중에서 가장 대중적인 명곡이 되었다. 이 그윽한 선율이 유명한 스타가 한 사람도 출연하고 있지 않은 영화를 걸작으로 만들어 낸 것은 아닐까.


`엘비라 마디간은 보 비델베르그 감독이 36세 때 만든 영화로, 폐쇄된 공간과 인공적인 조명을 싫어하여 절대 실내촬영을 하지 않는 그는 대부분 야외 촬영으로 자연의 빛을 통한 아름다운 컬러를 창조해 냈다. 전원풍경이며 농가의 모습, 포도주 빛깔 등이 마치 르느와르의 회화를 연상시킨다.

이 영화에서 엘비라 마디간으로 나오는 피아 데게르마르크가 영화 배우가 될 줄은 그 누구도 몰랐다. 감독 보 비델베르그가 피아 데게르마르크의 사진을 신문에서 처음 보았을 때, 그녀는 영화에 한번도 나온 적이 없는 17살의 학생이었으며, 스웨덴 왕립발레단원이었다. 그녀는 보 베델베르그의 가슴을 설레게 할 만큼 아름다운 금발 미녀였고 모든 사람들이 숭배할만한 눈부신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장차 어학을 공부하여 통역사가 되는 것이 꿈이었던 그녀는 엘비라 마디간역을 수락했고, 놀랍게도 깐느 영화제에서 여우주연상을 수상하여 영화사를 장식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 어디에도 사랑이 없는 가정과 질식할 것만 같은 군대에서 탈영한 젊은 장교 식스틴 스파레와 서커스단에서 뛰쳐 나온 엘비라 마디간을 따뜻하게 맞아 줄 안식처는 없었다. 엘비라의 비단 주머니에도 돈이 떨어졌고, 식스텐의 금박 돈지갑도 비었다.

어느 날 왕실근위대의 동료 장교가 찾아와 설득한다.

“어떻게 자네처럼 신분이 높은 사람이 저런 광대 아이와 함께 지낼 수 있겠나.” 그러나 식스텐의 결심은 단호하다.

“나는 우리가 단둘이 살수 있는 숲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겠네. 다시는 날 찾지도 말고 만났다고도 하지 말게."

둘은 더 깊은 산속으로 숨어 들어간다. 그들의 물건은 하나 둘씩 팔리거나 전당포에 맡겨 졌지만 배고픔은 자꾸만 더해 간다. 심지어 둘은 산딸기도 따먹고, 들판에 핀 꽃잎을 아무리 먹어도 배고픔은 사라지지 않았다. 마침내 어느 날 아침, 식스텐은 죽음을 생각한다. “뭘 생각하고 계세요? 집 생각? 아니면 부인을 생각하고 계시나요? 그렇죠? 돌아가고 싶어졌지요?"

엘비라의 걱정스러운 물음에 식스텐은 매우 의미심장한 대사를 말한다.

“아니, 괜찮아. 난 이미 집을 나와 버렸으니까. 난 군대에 있기 때문에 잘 알아. 총검이 사람을 쏘고 찌를 때 내장까지 이르기엔 많은 막(膜)이 있지. 난 그 막 하나 하나를 잘 알고 찌르고 싶었어. 무엇에도 철저하고 싶어. 난 이제 일정한 테두리 안에서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해. 처자도 귀족이라는 신분도 장교로서의 모든 것도 다 버리고 다만 너와의 사랑에 목숨을 바치고 싶을 뿐이야."

엘비라에 대한 자신의 심경을 실로 명쾌하게 표현한 멋진 대사가 아닐 수 없다. 한정된 삶의 모든 것을 버리고, 짧은 순간이지만 오직 한 여자와의 사랑에 산 식스텐은 그것만으로도 진정한 인생을 살았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들은 마지막 피크닉을 위해 계란을 삶는다. 여자가 묻는다. “달걀을 어떻게 삶을까요?” 남자가 말한다. “물이 뜨겁게 펄펄 끓을 때부터 4분간.”이라고. 정말 그들은 완벽지향적인 사랑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은 봄의 들판으로 피크닉을 나간다.

새, 들꽃들, 눈부시게 흰 햇빛, 여자의 하얀 목덜미와 그리고 모짜르트.... 나비들이 날고 여자는 나비를 잡으려고 시냇가로 달려간다. 여자가 나비를 두 손으로 막 잡으려는 순간, 한 발의 총성이 울린다. 여자의 손 갈피 사이로 흰 나비가 날아간다. 그리고 이어지는 또 한 발의 총성. 마치 소네트처럼 짧고 아름다웠던 그 사랑의 최후를 장식한 것은 역시 모짜르트였다. 지금도 모짜르트의 피아노 협주곡 제 21번 안단테의 선율을 들을 때 마다 전율하면서 저 가슴 시리도록 아름다웠던 두 연인의 최후를 떠올리는 것이 어디 필자 뿐이겠는가.

엘비라 마디간이라는 소녀의 티 없이 순수하고 아름다운 모습이 얼마나 완벽하게 모짜르트의 멜로디와 조화를 이루었던가. 사랑을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질 수 있었던 그들의 용기가 사뭇 부럽기만 하다.

 그만큼 우리는 만남과 헤어짐이 무상한 세상, 감정이 메마른 세상에서 살고 있는 탓이 아닐까. 스웨덴의 젊은 귀족 식스텐 스파레 백작과 서커스단 처녀 엘비라 마디간의 비극적 정사(情死)는 1889년에 있었다.

그로부터 어언 1백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으나 영화 `엘비라 마디간을 통해 그들은 지금도 세계의 청춘 속에 살아있다. 저 아름다운 모짜르트의 멜로디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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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세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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