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펌] 책소개- 춤추시는 하나님- 헨리 나우웬
cf. 국내 책들 중에선 옥한흠 목사님의 <고통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추천합니다.
-책 소개.
춤추시는 하나님- 헨리 나우웬
(Turn My Mourning into Dancing)
이상민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5:4)
지
난 주 수요예배 말씀이 큰 은혜가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사건, 예수님께서 그 마지막 한 방울의 고통까지 남김없이 마신
순간이 있기에, 그 고통의 문제를 철저하게 순종으로 지나쳐오셨기에, 오늘날 우리의 구원, 나의 구원이 있음을 목사님의 말씀을
통해 돌아보았습니다. 그 목사님의 말씀과 연계해서 읽을만한 책으로 헨리 나우웬의 <춤추시는 하나님>을 소개하고자
합니다.
성공과 즐거움의 이면
지금 이 시대 사람들의 화두는, 성공, 즐거움일 것입니다. 그러나 이 단어들의 이면에는 도외시된 우리 삶의 현실이 숨겨져 있습니다.
모
든 것이 성공으로 통하는 이 시대는 오히려 역설적으로 실패가 가득한 시대입니다. 일등만이 인정받는 일등주의는 다르게 말한다면,
일등 말고는 모두가 실패하는 논리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우리에게 성공보다 더욱 익숙한 것은 실패임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역
시 동일하게 우리의 삶은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더욱 가득한 삶입니다. 쾌락을 자극하는 대중문화는 즐거움을 끊임없이 강요하고
있지만, 우리 삶은 웬일인지 아무리 돌아봐도 즐거움보다는 고통이 충만한 것 같습니다, 존재론적으로도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이며, 니체가 밝힌바와 같이 우리의 가장 큰 비극은 태어났다는 사실, 그 자체임을 (니체의 철학은 무신론자의 눈으로 본
세상의 극단을 보여줍니다. 복음이 없는 현실인식은 궁극적으로 허무주의로 치닫을 수 밖에 없습니다) 우리는 현실의 고통 속에서
끊임없이 느낍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생각해볼 때, 우리 삶에 고통과 즐거움 중에 어느 것이 더 가득할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고통이 더욱 가득함은 저 혼자만의 생각일까요?
우리는 내려놓을 때 받는다
<
춤추시는 하나님>에는 아주 인상적인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커스 공중묘기의 곡예사들 중 가장 노련한 사람은 공중으로
날아오르는 사람이 아니라 그 사람을 받아주는 사람이라고 합니다. 받아주는 사람이 무슨 일이 있어도 자신을 안전하게 받아줄 것을
믿기에 곡예사는 목숨을 걸고 공중으로 날아오를 수 있습니다. 튼튼한 그네를 놓아야 반대편 그네까지 우아한 반원을 그리면서 날
수가 있습니다. 상대방이 나를 잡으려면 일단 놓아야 합니다. 허공에 용감히 뛰어들어야 합니다. 고통의 문제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그 고통 속으로 과감하게 뛰어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만지시면 고난은 환희의 춤으로 변한다
앞
서 밝힌 것처럼 이 시대는 성공과 즐거움이 충만한 시대가 아닙니다. 그 환상 속 이면에는 고통의 문제가 가득함을 인정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 사실을 받아들일때, 우리는 고통 속에 하나님의 깊은 뜻이 있으며 더 나아가 그 고통을 통해 하나님과 만나고,
하나님과 춤을 추는 단계로 까지 나아갈 수가 있습니다. 나우웬의 <춤추시는 하나님>은 바로 그 믿음의 역설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입니다.
작은 자아에서 더 넓은 은혜로
움켜쥠에서 내려놓음으로
운명론에서 희망으로
감정의 조종에서 순전한 사랑으로
두려운 죽음에서 환희의 삶으로......
나
우웬은 예일대학의 교수직을 버리고 정신박약장애인 공동체인 라르쉬의 캐나다 공동체 데이브레이크에서 사역을 하다 1996년에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남긴 20여권의 책들은 간결한 문장과 적절한 묘사로 영혼을 맑게 울리는 힘이 있습니다. 물론
그의 책들은 하나하나가 걸작이지만, 그의 책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은 바로 그의 삶속에 빛나는 그의 순수한 영혼입니다. 글쓴이의
삶을 통해 글이 더욱 빛나는 것은 마치 아름다운 보석이 누구보다 아름다운 신부의 몸을 빛내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우
리 주위엔 힘든 시기를 겪고 있는 사람이 유난히 많습니다. 저부터 고통의 문제에서 자유롭지 못하니까요. 그런 제게 이
<고통의 문제>는 단순한 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다가왔습니다. 고통은 때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임을, 그
고통을 피하려고만 하지않고, 그 고통 속에 용기있게 뛰어들 때 그 깊은 곳에서 바로 춤추시는 하나님을 만날 수 있음을 전 이
책을 통해 깨달았습니다. 주위에 혹시 힘들어하는 지체가 있다면, 작고 가볍고 가격도 싼 이 책(7000원!!)을 한권 선물해주면
어떨까요? 그 지체에게 선물해주는 것은 단순한 한권의 책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 그의 삶속에서 역사하시는,
춤추시는 하나님일테니 말입니다.
<춤추시는 하나님>과 함께 읽을만한 다른 책들:
-헨리 나우웬의 모든 책들이 연관된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아무 책이나 읽어도 걸작입니다.
-국내 책들 중에선 옥한흠 목사님의 <고통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추천합니다.
-고전으로는 C.S 루이스의 <고통의 문제>가 있습니다. <순전한 기독교>도 연관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키에르케고르의 <죽음에 이르는 병 Sygdommen ti1 Dø den> 역시 완벽한 신앙서적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주제에 대해 깊은 통찰을 전해주는 고전입니다. 한 유명한 목사님이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으로 이 책을 언급하신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필립 얀시의 책들은 믿음이 연약한 보통 신자들의 눈높이에서 신앙의 문제를 접근해 공감을 일으키는 방식의 글을 즐겨씁니다.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십니까?> 가 이 주제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퍼온곳;http://www.cyworld.com/fortheatre/26095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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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온곳'http://blog.naver.com/kco6567/120090424240
“4 감정의 조종에서 순전한 사랑으로에서 발췌함”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면 변하는 힘을 지닌 깊은 사랑의 자리로 나아갈 것인가?
어떻게 하면 타인의 기쁨과 아픔을 온전히 경험할 때,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나 더 큰 기쁨을 맛볼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우리의 깨진 인간관계가 치유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긍휼이 우리의 긍휼이 될 수 있을까?
우리가 사랑할 수 있는 것은 먼저 사랑받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먼저 베푸시는 하나님의 사랑이 실현되는 한적한 장소를 찾아 기도 하셨다.
우리는 다른 사람의 반응에 개의치 않고 자신을 바라볼 때에만 진정으로 사람들을 섬길 수 있다.
이런 접근은 두 가지 훈련을 통해 우리 안에 뿌리내릴 수 있다.
그 하나는 고독이다.
고독은 반사회적 감정을 품고 침묵 속으로 물러나는 것이 아니다.
고독은, 우리가 혼자여서 때로 치유가 필요하다는 서글픈 사실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합할 수 있는 기회가 된다.
사실 고독은 다른 두 비슷한 말과는 사뭇 의미가 다르고 풍부하다.
혼자라는 말은 흔히 인간은 누구나 독립된 존재라는 중립적 의미로 쓰인다.
외로움이라는 말에는 타인의 부재나 쓸쓸함이나 아픔이 더 배어 있다.
그러나 고독에는 기쁨과 가능성의 기운이 담겨 있다.
그리스도인에게 고독은 단순히 숲이나 사막이나 산꼭대기에 숨어들어 은밀히 칩거한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감히 선다는 뜻이다.
단순히 혼자 있는 시간을 확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과 단둘이 있기 위해서다.
하나님과 단둘이 있을 때 우리는 무엇을 하는가?
사람들 대부분은 생각하거나 말하거나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하나님과 단둘이 있을 때, 듣는 것도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른다.
고독이란,
곧 나를 '사랑하는 자' 라 부르는 음성,
나를 다음장의 모험으로 이끄시는 음성,
하나님이 예수님께 하신 것처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마 3:17)
말씀하시는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자리다.
'사랑하는 자' 라는 말은 우리 삶 전체에 생생히 울려 퍼질 수 있다!
당신은 들을 수 있는가?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을 대변하는 듯한 여러 목소리를 들으며 살아간다.
"너 자신을 입증해 보여라. 뭔가 남다른 일을 해라. 그러면 내가 사랑으로 임하겠다." 이런 말도 들려온다.
"경우에 맞는 일을 해라. 사람들 입에서 네 칭찬이 나오게 해라. 어떻게든 돈과 재산과 권력을 모아라.
그러면 내가 너를 사랑하겠다."
마음이 불안해서 우리는 안간힘을 다해 이런 목소리에 부응하려 한다.
그리하여 우리는 자신이 주목받아 마땅하고, 칭찬받을 만큼 선하며,
애정과 관심을 당연히 받아야 할 존재임을 입증하느라 늘 바쁘다.
우리는 위세를 부리거나 흔적을 남기라고 자신을 다그친다.
우리는 흔히 그것을 '소명'이라 부르지만 예수님은 '유혹' 이라 부르신다.
성전에서 뛰어내려 능력을 보이고 돌을 떡으로 바꿔 사역의 자격을 입증하라고 다그치는 자를
예수님은 절대로 용납하지 않으셨다.
그분은 자신을 '사랑하는 아들' 이라고 부르신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셨다.
이것이 그분의 사역과 소명의 기초다.
그분은 단순한 피상적 선행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셨다.
그분은 하나님의 임재 자체를 품으셨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사랑받는 자다.
명성이나 훌륭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이 영원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로서는 그 사랑을 선포하는 음성을 듣기 힘들다.
어떤 사람은 "아무 소리도 안들린다"고 말한다.
우리는 '성공'이나 '결과'를 내세우는 다른 모든 목소리를 듣는 데 매우 익숙하고,
한편으로는 상당히 조건화 되었다.
때로는 '내 귀에는 여기로 가라, 저것을 하라, 이 명령을 수행하라고 다그치는 목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바로 그때 우리는 다른 목소리를 간절히 원한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사역의 열매를 보아서는 안되고,
재산을 가져서도 안되고, 소유를 즐겨서도 안된다는 말이 아니다.
다른 사람들의 애정과 사랑을 받으려 해서는 안된다는 말도 아니다.
단지 세상의 변덕스런 약속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는 자' 라 부르시는 하나님의 말씀에서만 우리 정체의 기초를 찾을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로 살아간다.
우리가 태어나기 전에도 그랬고 우리가 죽은 후에도 그럴 것이다.
출생과 죽음사이의 어떤 상황도 이 사실을 무효화 할 수 없다.
데이브레이크와 같은 공동체 기관인
라르쉬 공동체의 창설자 장바니에는 14년이란 오랜 세월 동안 혼자지내며
기도하고 말씀을 읽으면서 하나님의 인도를 구했다.
바니에는 큰기관을 구상한 일이 없다.
다만 하나님을 만나면서 중증장애인 두명을 초청해 함께 살면서
믿음과 섬김의 예배 공동체를 만들기로 어느날 결단했을 뿐이다.
바니에는 "나는 최대한 많은 사람을 도와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세상의 모든 정신 장애인을 위해 뭔가 해 보자'고 외치지도 않았다.
그저 "어려운 사람 두명을 데려다 함께 살기 시작하라"는 음성을 들었을 뿐이다.
바니에는 어느 시설을 찾아가 다운증후군인 두 남자를 만났다.
부모도 없고, 다른 가족도 없고, 찾아오는 사람도 없고, 친구도 없는 딱한 사람들이었다.
바니에는 작은 집을 세내 "여기에 가족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보자"고 말했다.
그들은 성경에 나오는 노아의 방주를 따 그곳을 '방주'(장 바니에의 모국어인 프랑스어로 '라르쉬' )라 불렀다.
고독한 귀 기울임에서 조촐하게 출발한 공동체가
지금은 전 세계 작은 집에서 장애인과 봉사자를 합해 회원이 3,000명에 달하는 공동체 조직으로 성장했다.
고독에 대한 얘기에는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법과 상처받은 이들과 더불어 살아가는 법에 적용할 부분이 아주 많다.
우리는 내게 상처 입힌 자가 누구며 그 상처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따지느라 시간을 많이 소비하기 때문이다.
인생을 살아오면서 우리는 정작 나를 사랑하는 부모, 자녀, 동료, 친구 배우자에게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사랑받고 싶다는 가장 깊은 욕구를 채워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기에
우리는 고독 속에서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한다.
이것은 우리에게 끊임없는 도전이다.
아침을 먹으러 가기 전만해도 내 머릿속에는
지금모습과 조금 달라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족히 스무명은 떠오른다.
이 사람은 몸매 관리 좀 하면 좋겠고,
그 사람은 지각 좀 그만하면 좋겠고,
저 사람은 무뚝뚝하지 않으면 좋겠고‥‥
이런 상황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긍휼을 베푸는 법을 배워야한다.
매사에 완전을 바라는 것이 우리 마음이지만,
사실 우리 역시 항상 지극히 불완전해 보이는 상황 속에 살기 때문이다.
우리는 사랑과 삶이 모두 불완전한 사람들과 부닥치며 산다.
그러나 우리를 극진히 사랑하는 사람들이든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든,
바로 그 사람들 속에서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른다.
소란스런 삶의 방해와 혼선 속에서 그 사랑을 구별해 낼 수만 있다면,
누군가 우리에게 상처를 주거나 해를 입히기 전에 이미 그 사랑이 우리에게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사랑은 우리가 죽은 뒤에도 영원히 존재할 것이다.
고독은 다른 무수한 음성에 귀를 내주지 않는 것이다.
고독을 통해 우리는 그 사랑의 음성을 다시 들을 수 있다.
자신이 사랑받는 자임을 믿는다면
우리는 자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용서를 베풀 수 있다.
'당신을 놓아드립니다. 당신이 저를 용서하지 못할지라도 기꺼이 당신을 용서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사랑받기 때문입니다" 하고 말한다.
거기서 더 나아가 이런 말도 할 수 있다.
'당신이 아직, 어쩌면 영원히 저를 용서할 수 없을지라도 당신의 용서를 구합니다."
물론 고독은 쉽게 얻을 수 없다.
고독을 방해하려고 음모를 꾸미는 세력은 얼마든지 많다.
끊임없이 울려 대는 전화벨과 첨단 통신망은
우리의 시간과 주목을 끌려는 다른 사람의 요구에서 결코 우리가 멀리 떨어져 있게 놔두지 않는다.
텔레비전도, 신문도, 라디오도, 전화도, 잡담도 없이 한 시간 동안 그저 의자에 앉아만 있으려고 한 적이 있는가?
어렵사리 시끄러운 사회에서 벗어나 조용히 틀어박혀있다 해도
이번에는 내면의 음성이 일어나 마음을 요란하게 휘저어 놓을 것이다.
고독을 훈련이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고독은 어느 정도의 집중이 필요하다.
외롭다 생각하니 거부당한 느낌이나 무용지물이 된 기분을 여간해서 완전히 무시할 줄 모르기 때문에 특히 그렇다.
우리는 불안한 자아에게 우리 자신의 존재를 확인시키기 위해 활동을 멈추지 않으려 한다.
침묵 속에 하나님과 단둘이 있으려면 끊임없는 그런 세력에 눈길을 주지 말아야한다.
우리는 스스로 만들어 내는 것보다 깊은 통찰과 연합을, 하나님과 함께 할 조용한 시간을 기다리려는 결단이 필요하다.
두 가지 훈련 중 다른 하나는 고독과 단짝인 침묵이다.
우리는 듣고 말하는 모든 것을 통해서만 아니라,
스스로 결단해서 듣고 말하지 않는 것을 통해서도 성령의 삶에 참여한다.
우리 내면과 우리 가운데 계신 성령은,
우리가 하는 구원의 말과 치유행위를 통해서 뿐 아니라,
침묵이라는 귀 기울임을 통해서도 나타나실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침묵은 두려울 수 있다.
침묵하라고 하면 겁에 질리는 이들이 많다.
침묵은 우리를 얼어붙게 하며 답답하게 할 수 있다.
그런 침묵에서는 결코 새로운 것이 태어날 수 없다.
그리고 침묵이라는 귀 기울임에서 태어나지 않은 말은
사람을 아프고 괴롭게 할 수 있다.
'말이 많고,' 언어를 압제와 조종의 도구로 사용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의 말은 기회주의적인 말이 된다.
이런 말은 치유력도 없고 연합에도 도움이 안 된다.
심지어 연합을 위한 귀중한 침묵을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이 뒤죽박죽이 되게 한다.
이런 문맥에서 자유케 됨이란
침묵과 말사이의 친밀한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다.
둘 다 열매를 맺을 수 있도록 말이다.
우리는 적절한 때를 가려 말을 하고 손을 내밀고 언어로 감화를 해야 한다.
그러나 침묵이 가장 깊은 섬김이 되는 시점도 분명히 가려낼 줄 알아야한다.
하나님이 성령을 보내실 때 그런 일이 일어난다.
결국 우리는 침묵과 언어, 둘 다를 통해 하나님을 경험한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은 "한적한 곳으로 가사 거기서 기도하셨다" (막 1:35).
동시에 그분은 하나님이 주신 말로 말씀하셨다(요 14:10).
침묵과 언어가 둘 다 제자리에 있었고, 그분은 침묵 속에서 적절한 말을 찾으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