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파필터는 2개가 있다.
손으로 잡는 본체에 2개의 필터가 있다.

윗 필터를 빼는 방법은, 본체 맨 윗부분의 원 둘레의 안쪽의 8개 튀어나온 것늘 잡고 시계방향으로 돌리면 된다.
어디까지 돌려야 할지 표시가 있다.
동영상 추가요

아랫 필터는 아직 파악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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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세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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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갈치 요리한 방법 //24.1.27

0. 냉동된 갈치를 상온에 두어 해동.

1. 팬에 기름 두르고 팬을 데우기

2. 팬에 종이호일을 깔고

3. 생선을 그 위에 올려놓고 

4. 뚜껑을 닫고 가끔씩 갈치를 뒤집어 주기. 노

Posted by 세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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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월간조선 2007년
http://monthly.chosun.com/client/news/viw.asp?ctcd=&nNewsNumb=200701100041

「갑종장교 56년」역사 속으로
마지막 갑종간부 출신 權泳基 2군사령관의 전역식.
  權泳基(권영기·59) 2군사령관(육군 대장)이 2006년 11월17일 40년의 軍생활을 마감하고 전역했다. 權대장의 전역은 한 군인의 전역이 아니라, 6·25 전쟁 이후 56년의 전통을 이어온 갑종간부 시대를 마감하는 「사건」이었다. 權장군은 현역으로 남아 있던 마지막 「갑종간부」 출신 장교였다.
 
  權장군은 진주高를 졸업한 후 병사로 복무하다 1968년 갑종간부 222기로 임관했으며, 1970~1971년 중위로 베트남戰에 참전했다. 權장군은 1968년 7월 소위로 임관해 金寬鎭(김관진ㆍ육사 28기) 합참의장보다 임관이 4년 빠른 육군 최고참이었다. 갑종간부 후보생 과정은 1950년 1월 육군보병학교에 설치돼 한국전쟁 직후인 같은 해 7월15일 1기 363명이 처음으로 임관한 후, 1969년 230기까지 4만5424명의 장교를 배출했다.
 
  전역 직후 기자와 만난 權장군은 『국가를 위해 40년의 봉사기간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저에게 명예롭고 은혜로운 일』이라며 『훌륭한 선배들이 많이 계신데도 불구하고, 마지막 전역자이기 때문에 주목받는다는 게 솔직히 부담스럽다』고 했다.
 
  權泳基 예비역 대장은 갑종장교의 역사적 의미에 대해 『대한민국이 가장 힘들었던 시절 전선을 지킨 소대장·중대장들』이라고 했다. 그는 『소대장으로 참전했던 베트남전쟁이 40년 軍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다』고 말했다.
 
  「갑종장교 출신들이 보직과 진급에서 차별받았다는 이야기가 있음에도 불구, 대장까지 진급하셨다」고 하자, 權장군은 『부하·동료·상관들이 모두 도와준 덕분』이라고 했다.
 
  『베트남 전쟁을 통해 힘 없는 나라가 전쟁을 겪을 때 어떤 수모를 겪는지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낮에는 한국군과 미군의 통제로 치안이 유지됐지만, 밤이 되면 무법천지가 됐습니다. 敵(적)들이 民家(민가)로 내려와 여자를 납치하고, 식량을 탈취했습니다.
 
  힘이 없는 나라가 되면, 外侵(외침)을 당했을 때 국민들이 짐승 취급을 당합니다. 분단국가 한국도 주변 4강 틈바구니에서 힘을 기르지 않으면 그런 일이 안 생기란 법이 없습니다. 세계화 시대에 軍도 세계 속에서 경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각자의 계급과 직책에 상응하는 전문성을 갖추어야 합니다』
 
 
  1期는 임관 전에 한국전쟁 참전
 
  1950년 7월15일 임관한 갑종간부 1기 후보생들은 임관하기도 전에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갑종장교 출신 예비역 장성 중에서는 한국전쟁 당시 소대장을 맡고, 베트남전쟁 당시 대대장·중대장을 맡은 사람이 많았다. 갑종 1기생으로 11~12代 국회의원을 지낸 柳根桓(유근환·77·예비역 소장) 국제한자진흥협의회 이사장의 회고다.
 
  『육군보병학교에서 두 달 교육받고 있던 중 한국전쟁이 터졌습니다. 당시 일부는 汶山(문산)으로 출동했고, 저와 같은 신입들은 다음날(6월26일) 새벽 김포로 출발했어요. 차가 없어서 민간 버스를 모두 징발해 이동했습니다. 총이랑 다른 장비들도 없어서 부평에 있던 옛 일본군 兵倉(병창)에서 구식 소총을 들고 갔습니다.
 
  전쟁이 터졌다고 하지만, 실제 전투 경험은 전무했기 때문에 동기들 중에서는 「전쟁이 터졌으니 이제 밥은 실컷 먹겠구나」라며 좋아하는 사람도 있었어요. 보병학교 급식이 좋지 않았으니까요.
 
  막상 김포 전선에 나가 보니, 지옥 같았습니다. 우리는 박격포밖에 없었는데 북한군은 105mm 대포를 쏘아댔습니다. 지휘관이 「포 없이 어떻게 전쟁하겠냐」고 신경질 내는 소리도 들었어요. 머리 위로 「슝~슝」 포탄 날아가는 소리가 정신없이 들렸습니다. 그 소리에 동기생 하나가 미쳤어요. 막 소리를 지르고 뒹굴다가 결국 후방으로 끌려갔어요. 탱크가 밀려오기 시작하니, 그날 밤이 돼서야 철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康承宇(강승우·갑종장교 7기) 소위는 육군 9사단 30연대 1중대 3소대장이었다. 1952년 10월12일, 康소위는 강원도 철원군 묘장면 산명리의 한 야산에서 전사했다. 이 야산을 사람들은 「백마고지」라 불렀다.
 
  康소위는 백마고지 전투 중 그의 소대원들이 敵의 기관총에 맞아 목숨을 잃는 장면을 눈앞에서 지켜봐야만 했다. 적진을 점령하기 위해 敵의 기관총을 무력화할 필요가 있었다. 소대가 갖고 있던 장비는 소총과 수류탄이 전부였다.
 
  康소위는 소대원 두 명을 이끌고 수류탄 안전핀을 뽑아든 채 기관총 진지로 돌격했다. 이들 「육탄 3용사」의 활약에 힘입어 9사단은 이날 오후 1시경, 백마고지를 탈환했다. 정부는 康소위에게 1계급 특진과 함께 을지무공훈장을 追敍(추서)했다. 서울 용산 전쟁기념관 전시실에는 康承宇 소위를 비롯한 육탄 3용사의 동상이 전시돼 있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갑종장교 수는 1만508명. 한국전쟁에 참전한 장교 총 3만2970명 중 32%에 달한다. 이들 참전 갑종장교 중 805명이 전사했다.
 

 
  『갑종장교라고 군번을 바꿔 버리다니』
 
  河小坤(하소곤·79) 예비역 소장은 폐 한 쪽이 없다. 1979년 12월12일, 당시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이었던 河소장은 신군부의 鄭昇和(정승화) 육군 참모총장 강제연행을 저지하다 헌병 대위가 쏜 총탄에 가슴을 맞았다. 그는 『총탄이 관통하는 순간 가슴이 뜨겁고, 다리에 힘이 풀리고, 정신이 흐릿해졌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河장군은 갑종장교 1기로 임관, 갑종장교 중 최초로 별을 단 인물이다. 그는 갑종장교단의 모임을 조직했고, 4만5000여 명 갑종장교들을 한데 모으는 구심점 역할을 해왔다.
 
  河장군은 『동기생 60명이 국립묘지에 묻혔다』고 했다. 그는 『갑종장교에 대한 차별은 말할 수 없이 심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河장군은 『군인은 軍番(군번), 계급, 이름순으로 말한다』면서 『가장 중요한 갑종장교의 군번을 바꿔 버린 것은 姓(성)을 갈아 버린 것보다 더 지독했다』고 했다.
 
  『제 군번은 171××이었습니다. 연대장 시절인 1969년, 갑종 출신들은 군번 앞에 1을 하나 더 붙이라는 명령이 내려왔습니다. 군번이 1171××가 되는 겁니다. 순간 모욕을 느껴 육군본부를 찾아가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당시 육군본부 인사관리처 全斗煥(전두환) 소령이 육사 출신을 우대하기 위해 만든 제도라고 하더군요. 죽은 동기들 비석에 있는 군번은 어떻게 되는 건지 답답했습니다. 다른 차별로 인한 서러움이야 모두 이겨낼 수 있다고 해도, 군번을 바꾼 건 정말 뼈아프게 서러웠습니다』
 
  河小坤 장군은 준장 진급 이후 현역 갑종장교들을 모아 「갑종전우회」를 조직했다. 당시 현역 갑종장교들은 軍 내부에서의 심한 차별로 인해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 河小坤 장군은 7사단장, 1군 사령부 참모장 등을 거쳐 육군본부 작전참모부장으로 전역했다. 河小坤 장군은 한쪽 폐로 호흡이 힘겨운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우리는 국가에 헌신했다』고 나지막하게 말했다.
 

 
  200여 명의 장군 배출
 
  갑종전우회 관계자들은 『육군 내에서 갑종장교에 대한 차별은 분명히 존재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갑종장교단은 吳滋福(오자복·76·갑종 3기), 曺永吉(조영길·66·갑종 172기) 前 국방부 장관을 비롯, 200여 명의 장군을 배출했다. 6·25 전쟁을 비롯, 베트남戰·對간첩작전 등 수많은 전투에서 전공을 세워 태극무공훈장 3명을 포함해 5342명이 무공훈장을 받았다.
 
  曺永吉 前 국방장관은 『갑종장교들의 희생을 기억해 달라』고 했다.
 
  『한국전쟁 초기부터 갑종장교들은 많은 희생을 치렀습니다. 이들의 희생이 나라를 구하는 데 기여한 것에 대해 의문을 품는 사람은 없습니다. 갑종장교라는 출신의 한계 때문에 능력이 뛰어남에도 불구하고, 자기 능력을 다 발휘하지 못한 면도 없지 않았습니다. 우리 軍이 創軍(창군)하고 발전하는 동안, 갑종장교단이 軍의 허리 역할을 하며 이룩한 공로는 적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베트남전쟁 영웅 林東春 대위
 
육군보병학교에 세워진 故 林東春 대위의 동상
  베트남戰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1972년 4월의 「안케패스(안케 지역의 고개)」 전투를 기억한다. 안케전투의 영웅 故 林東春(임동춘·갑종장교 230기) 대위는 수도사단 기갑연대 2중대 1소대장이었다. 베트남 안케고개 638고지에서 林東春 대위와 소대원들은 수류탄으로 싸웠다. 林東春 대위는 전투 중 다리에 부상을 입었다. 피를 흘리고 다리를 절룩거리며 그는 계속 수류탄을 적진으로 날렸다. 敵의 벙커 다섯 개가 폭파됐다. 점령이 불가능해 보였던 안케고개의 638고지는 이렇게 점령됐다.
 
  안케패스 전투에서 林東春 대위는 전사했다. 정부는 林東春 대위에게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그의 모교인 전남 장성의 육군보병학교에는 지금도 「동춘관」이 있다. 동춘관 바로 앞에는 林東春 대위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베트남戰에 참전한 갑종장교 수는 1만4712명으로 전체 참전 장교 2만2403명의 65.7%를 차지했다. 이 중 174명이 베트남에서 전사했다. 육군은 매년 군단급 1명씩 총 14명의 모범 소대장을 선발해 「東春賞(동춘상)」을 시상한다.
 
  金石元(김석원·66·갑종 166기) 전쟁기념관장 역시 갑종장교 출신이다. 金石元 전쟁기념관장은 갑종장교가 사라지는 것에 대해 『갑종장교들은 험난한 시대에 태어나서 육군의 핵심 전력을 이룬 사람들』이라면서 『이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게 솔직히 섭섭하다』고 했다.
 
  1998년 군수사령관을 마지막으로 전역한 金石元 장군은 기갑연대 3대대 작전장교로 베트남戰에 참전했다. 365일 내내 작전을 해본 경험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큰 도움이 된다고 했다.
 
  『베트남전쟁을 치를 때, 주위에 갑종 장교가 정말 많았습니다. 우리 대대는 중대장 4명 중 3명이 갑종장교였고, 소대장 인원 역시 4분의 3이 갑종장교 출신이었습니다. 높은 계급으로 올라갈수록 갑종장교 수는 줄어들었지만, 초급장교들인 소대장·중대장 중에서는 갑종 장교 수가 절대적으로 많아 갑종장교들이 베트남戰을 치른다는 우스갯소리도 있었습니다.
 
  베트남戰에서 작전은 모두 헬기로 합니다. 베트남戰에서 M16 소총을 처음 만져 봤습니다. 전쟁을 대부분 미군이 지원한 음식·화기·장비·이동수단으로 했습니다. 베트남戰을 통해 우리의 전투력이 한 단계 상승하게 된 것도, 미군과 공동작전을 펼치면서 경험을 쌓은 겁니다. 이때 갑종장교들이 초급장교로서 익힌 전술은 한국軍 발전에 밑거름이 됐다고 생각합니다』
 
  갑종장교단중앙회 朴熹模(박희모·74·예비역 중장·갑종 9기) 회장은 베트남戰에 대대장으로 참전했다. 칠순을 넘긴 노병은 정정했다. 180cm 넘는 큰 키에 여전히 허리도 꼿꼿했고, 목소리에 힘이 넘쳤다. 그는 보성高 2학년 재학 중 갑종장교로 선발돼 소위로 임관했다.
 
 
  『월급 받으려고 전선에 간 것 아니다』
 
故 송서규 대령의 안장식에서. 당시 김계원 육군참모총장이 故 송서규 대령의 부인 품에 안긴 아들 재용군에게 태극무공훈장을 걸어 주고 있다.
  『우리는 어떤 보상을 위해 전선에 나간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해야만 했고, 그래서 우리가 한 것입니다. 그때 소위 임관하면 월급이 2만환이었습니다. 치약 하나 살 수 있는 돈이었어요. 그 돈 받겠다고 전선으로 뛰어들었겠습니까. 돌이켜 보면 갑종장교제도는 무모한 제도였다고 생각합니다만, 그땐 나라를 구하겠다는 일념으로 전선으로 뛰어들었습니다』
 
  노장은 목소리를 높였다.
 
  『전쟁이 나면 방어할 수 있는 국가가 제대로 된 국가입니다. 한국전쟁 당시 대한민국은 제대로 된 국가의 형태를 갖추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전쟁이 났는데, 최전방에서 소대를 이끌 소대장들이 없었던 것입니다. 갑종장교가 그 역할을 했습니다. 그래서 많이 죽었습니다. 우리가 한국전쟁에서 실제 전투를 사실상 도맡아 했습니다.
 
  전쟁이 나기 전까지 육군 장교 중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은 많지 않았습니다. 전쟁이 터지면서 고등교육을 받은 인원이 대량 입대했고, 그것이 짧은 시간 동안 軍이 발전할 수 있는 밑거름이 됐습니다』
 
  朴熹模 예비역 중장은 대위 시절 육군보병학교 교관을 지냈다. 당시 육사 11기가 보병학교에 입교했다. 육사 11기에는 全斗煥·盧泰愚(노태우) 대통령이 속해 있었다.
 
  朴熹模 장군은 최근 軍의 교육훈련과 정신전력 약화를 우려했다.
 
  『현재 軍 장병들은 실전 훈련을 지금보다 더 강도 높게 해야 합니다. 총도 여러 번 쏘아 봐야 사고가 안 나는 법입니다. 자살이 두려워 군인에게 실탄을 주지 못한다는 말을 세계 어느 곳에 가서 할 수 있겠습니까. 육군참모총장의 임무는 전투 지휘가 아니라, 장병들의 훈련을 위한 충분한 물량 공급을 책임지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1961년, 육군보병학교 교육생 복장.
 
 
 
육사 출신과의 경쟁
 
  나사렛대학교 부동산학과 尹皇地(윤황지·65·갑종 165기·예비역 육군 중령) 교수는 베트남전쟁 당시 작전과 대위로 근무했다. 그는 『육사 출신들에게 뒤지기 싫어서 더 열심히 공부했다』면서 『사회에 나와서 육사 출신 장교들을 만나 「갑종장교들이 육사 출신보다 10배는 더 노력하는 장교였다」는 말을 들었을 때 뿌듯했다』고 했다.
 
  2006년 11월6일, 제주도 제주시 충혼묘지 입구에서 故 송서규 대령의 39주기 추모식이 있었다. 이날 행사에는 金泰煥(김태환) 제주지사를 비롯 송서규 대령의 부인 허록(74) 여사, 朴熹模 갑종장교단중앙회장 등이 참석했다.
 
 
  전몰 갑종장교 추모식에 국방장관 不參
 
2006년 10월 육군보병학교에서 열린 전몰 갑종장교 영령 추모제.
  갑종장교 7기로 임관한 송서규 대령은 베트남戰의 영웅이었다. 송서규 중령은 육군 백마부대 대대장으로 베트남戰에 참전했다. 그는 베트남 닌호아 전투 최전방에서 직접 중대를 지휘했다. 3소대장이 전사하자 송서규 중령은 3소대를 직접 지휘했다. 그는 사병의 유탄 발사기를 들고 진격했다. 敵들은 30m 전방의 농가에 숨어 총을 쏘아 댔다.
 
  송서규 중령은 가슴에 敵의 총알이 박혔고, 다시는 일어나지 못했다. 1967년 11월6일, 그의 귀국 이틀 전이었다.
 
  정부는 故 송서규 중령에게 1계급 특진과 태극무공훈장을 추서했다. 1967년 12월 치러진 국립서울현충원 안장식에서 당시 金桂元(김계원) 육군참모총장은 故 송서규 대령의 부인 허록 여사 품에 안긴 아들 재용군(당시 네 살)의 목에 태극무공훈장을 걸어 주었다.
 
  2006년 10월13일, 전남 장성의 육군보병학교內 동춘관 앞에서는 「전몰 갑종장교 영령 추모제」 행사가 거행됐다. 한국전쟁·베트남전쟁 등 대한민국이 가장 힘들었던 시대에 전쟁터에서 전사한 984명의 갑종장교들을 위해, 참석자들은 고개를 숙여 묵념했다. 이날, 당시 尹光雄(윤광웅) 국방부 장관은 참석하지 않았다.
 
  동춘관 앞에는 베트남전쟁의 영웅 林東春 대위 동상과 함께 갑종장교 호국탑이 세워져 있다. 호국탑에는 「싸워 이겼노라」라는 문구와 함께 이렇게 쓰여 있다. 「나라를 위하여」. 현역 갑종장교는 이제 한 명도 남지 않았다.●
 
 

  ▣ 갑종장교란?
 
1960년대 육군보병학교의 야외교육 장면.
  갑종장교는 부족한 장교인원을 보충하기 위해 만들어진 간부 후보생 과정이었다. 급조된 갑종장교 출신들은 전선 곳곳에 배치됐다. 「甲種(갑종)」은 으뜸, 軍 용어로 「A급」을 의미한다고 한다. 광복 직후 사라지지 않았던 일본군式 용어다. 일본군 편제에서 갑종은 장교를, 을종은 부사관을 의미했다.
 
  갑종간부 후보생 과정은 고졸 학력 이상의 20세 이상 남자를 대상으로 1950년 1월 육군 보병학교에 설치됐다. 갑종장교는 민간인이나 현역 부사관 지원자 중에서 필기 시험과 지휘관의 추천을 통해 선발됐다. 1950년 1월 갑종간부 후보생 선발시험은 영등포 서울공업고등학교에서 실시됐다.
 
  선발된 갑종장교 후보생들은 경기도 시흥의 육군보병학교에서 24주간의 장교 훈련을 받고 소위로 임관했다. 6·25 전쟁 발발 직후인 7월, 1기생 387명이 배출됐다. 갑종장교 1기와 2기는 훈련을 다 마치기도 전에 한국전쟁을 맞았다. 갑종간부 후보생들은 계급장 대신 「士」자를 달고 전선을 넘나들었다. 이들은 김포·문산·과천 전투에서 소대장으로 활동했다.
 
  1969년까지 20년간 배출된 갑종장교 수는 230기까지 4만5424명이다. 1969년, 육군본부는 전체 장교의 수준을 고졸 학력에서 대졸 학력으로 더 높이겠다는 취지로 갑종간부 후보생 제도를 폐지하고 1970년 3사관학교를 설립했다.
 
  이제 軍이 어느 정도 위치에 올랐고, ROTC의 활성화 등으로 장교 양성 프로그램이 다양해진 것도 갑종장교 폐지의 한 이유였다.
Posted by 세모아
,

아래글의 3번째첨부파일속의 6.행위-제4장.xls

조제약이든 제조사에서 이미 포장된 일반의약품이든 모두 환불 불가로 판단됨.

법적 근거 : 복지부 고시(제2000-73호)
https://www.mohw.go.kr/board.es?mid=a10409020000&bid=0026&act=view&list_no=319237&tag=&nPage=635

---------------------------------------------

참조 글

로톡의 답변 :

약사법에서 명시적으로 환불 불가를 규정하고 있지는 않으나
복지부 고시(제2000-73호)에서
환자에게서 반납받은 의약품을 다른 환자에게 재사용하거나, 이를 보험으로 재정산 할 수 없도록 하는 등의 조치를
하였기에 환불이 불가능한 것으로 실무적으로 판단하고 있습니다.

https://www.lawtalk.co.kr/qna/314502

 

 

Posted by 세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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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 요약 :

방사능 물질이 내는 방사선이 있는데,
방사선(예: 알파선,베타선,감마선)에 의해서 우리가 내부/외부 피폭을 당한다.

 

Posted by 세모아
,

한국 철도노선도

여행 2023. 11. 5. 21:12

2023년 9월 1일 기준

출처: https://info.korail.com/info/contents.do?key=857

 

철도노선도(2023.9.1.).jpg
10.04MB

(업로드시 화면 가로가 1028px 넘는 것은 자동으로 1028px로 줄여서 화질 저하가 발생하므로,

파일로 첨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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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세모아
,

볼펜만 하나 있으면 된다.
아래 사진은 무궁화호 기차에서 사용한 방법이다


Posted by 세모아
,

출처 : https://appadal.tistory.com/501

위 출처에서 필요한 부분만 아래에 붙여 넣음.
---------------------------------------------------------------------------------------------

프린터를 추가하기 위해서는 먼저 바탕화면에 있는 윈도우 단추 아이콘을 클릭하거나 윈도우 키를 눌러줍니다. 그리고 메뉴 중 [장치 및 프린터]를 클릭합니다.

 

현재 연결된 프린터 목록이 나타납니다. 사용하고 있는 프린터가 있지만 한대를 더 추가해 보겠습니다. 상단에 있는 [프린터 추가]를 클릭합니다.

 

설치할 프린터 유형을 선택라는 메세지가 나오는데요. 보통 USB 연결을 할 때 [로컬 프린터 추가]를 많이 사용하지만 네트워크 프린터를 연결할 때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다.  

 

사용하고자 하고 싶은 프린터에 아이피 주소 를 알고 있으실 경우는 1번을 선택하시고 아이피 주소를 모를 경우에는 2번을 선택하시면 됩니다. 

 

- 로컬 프린터 추가: USB 프린터를 사용하지 않을 경우 사용하는 방법으로 연결하고자 하는 해당 프린터기의 IP 주소를 알고 있을 때 사용

 

- 네트워크, 무선 또는 Bluetooth 프린터 추가: 네트워크에서 공유하여 사용하고 있는 프린터 목록이 나타나며 사용하고자 할 경우 목록에서 선택하여 사용할 수 있음.

 

# 로컬 프린터 추가 연결방법

로컬 프린터 추가 연결방법은 해당 프린터 또는 복사기 IP를 직접 입력하는 방식입니다. 여기서 [새포트 만들기]를 선택해 주고 선택 목록에서 [Standard TCP/IP Port]를 선택해 준 다음 아래에 있는 [다음] 버튼을 클릭해 줍니다.

 

이제 해당 프린터 IP 주소를 [호스트 이름 또는 IP주소]란에 입력해 줍니다. 주소를 입력해 줄 때 포트 이름에 자동으로 해당 아이피 주소가 입력되는데요. 포트 이름은 따로 변경을 안하는 것이 경험상 좋습니다. 왜냐하면 문제가 생겼을 때 기본정보에서 확인하기가 쉽기 때문입니다.

 

이번에는 프린터 드라이버를 설치하는데요 제조업체를 선택한 후 프린터 목록에서 모델을 찾아 선택해 줍니다. 저희 사무실은 신도리코 제품을 사용하는데 제조업체 이름이 Ricoh로 되어 있더라고요.

 

만약 제품이 없을 경우에는 제조업체에서 해당 모델의 드라이버를 다운 받아서 설치하거나 [디스크 있음]을 클릭하여 드라이버를 주소를 연결해 줍니다.

 

프린터 이름을 입력해 주는데요. 한글로 입력하셔도 되지만 영문과 숫자로 주시는 좋습니다. 한글로 했다가 오류나는 경험이 있어서 저는 한글 이름은 추천하지 않습니다.

 

프린터 공유 설정 부분이 나타나는데요. 여기서는 [공유 안 함]을 선택해 줍니다.

 

기본 프린터로 설정 할 것인지 묻는 메세지가 나오는데요. 만약 잠깐 필요해서 연결을 하는 것이라면 체크를 해제하시고 계속해서 연결하여 기본으로 사용하실 때에는 그냥 두시면 됩니다. 그리고 [마침]을 클릭합니다.

 

설치가 완료되면 프리터 목록에 새로 추가단 프린터를 볼 수 있습니다. 

 

Posted by 세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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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blog.naver.com/lookhim/222718194251

 

용욱이의 편지

"난 못 죽어, 인제!" (부제 : 용욱이의 편지) "사랑하는 예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구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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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못 죽어, 인제!"

(부제 : 용욱이의 편지)

"사랑하는 예수님, 안녕하세요?

저는 구로동에 사는 용욱이에요.

구로국민학교 3학년이구요.

우리는 벌집에 살아요.

벌집이 무언지 예수님은 아시지요.

한 울타리에 55가구가 사는데요,

방벽에 1,2,3,4, … 번호가 써 있어요.

우리 집은 32번이에요.

화장실은 동네 공중변소를 쓰는데요,

아침에는 줄을 길게 서서 차례를 기다려야 해요.

줄을 설 때마다 저는 21번 방에 사는 순희 보기가 창피해

못 본 척 하거나 참았다가 학교 화장실에 가기도 해요.

우리 식구는요

외할머니, 엄마, 내 여동생 용숙이… 이렇게 네 식구예요.

우리 방은 할머니 말씀대로 라면 박스만 해서

네 식구가 다같이 잠을 잘 수가 없어요.

그래서 구로 2동 술집에 나가서 일하시는 엄마는

술집에서 주무시고 새벽에 오셔요.

할머니는 한 달에 두 번(그것도 운이 좋아야)

취로사업장에 가서 돈을 버시구요.

아빠는 청송감호소라는 데 계시는데

엄마는 우리보고 아빠가 죽었다고 그래요.

예수님, 우리는 참 가난해요.

그래서 동회에서 구호양식을 주는데도

도시락 못 싸가는 날이 더 많아요.

엄마는 술을 많이 먹어서 간이 나쁘다는데도

매일 술 취해서 어린애마냥 엉엉 우시길 잘하고

“이 애물들아, 왜 태어났니… 같이 죽어 버리자”하실 때가 많아요.

지난 4월의 부활절 날 제가 엄마 생각을 하고

회개하면서 운 것을 예수님은 아시지요?

저는 예수님이 제 죄 때문에 돌아가셨다는 말을 정말로 이해 못했었거든요.

저는 죄가 통 없는 사람인줄만 알았단 말예요.

근데 그날은 제가 죄인인 걸 깨달았어요.

친구애들이 우리 엄마보고 ‘작부’라고 하는 게 죽기보다 싫었구요.

매일 술 먹고 주정하고 울면서 같이 죽자구 하는

엄마가 미운적이 참 많았거든요.

부활절날, “엄마 미워한 것 용서해 주세요” 하고

예수님께 기도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피를 흘리시면서

“용욱아 내가 너를 용서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아서

저는 그만 와락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어요.

그날 교회에서 찐 계란 두 개를 부활절 선물로 주길래

그걸 집에 갖고와 할머니와 어머니에게 드리면서

생전 처음으로 전도를 했어요.

예수님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구요.

몸이 아파서 누워 계시던 엄마가 화난 목소리로

“흥! 구원만 받아서 어떻게 사니?” 하시면서

“집 주인이 전세금 50만원에 월세 3만원을 올려 내라는데,

구원이 아니라 50만 원만 내면 니가 예수를 믿지 말래도 믿겠다.” 하셨어요.

저는 엄마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신바람나서 기도하기 시작했어요.

제가 기도드린 거 예수님은 아시지요?

학교 갔다 집에 올 때도 몰래 교회에 들어가서 기도했잖아요.

근데 마침 어린이날 기념 글짓기 대회가 덕수궁에서 있다면서

우리 담임선생님께서 저를 뽑아서 보내 주셨어요.

저는 옛날을 그리워하면서 지금은 청송에 가 계신 아버지와

서초동에서 꽃가게를 하며 행복하게 살던 때 얘기를 썼어요.

청송에 계신 아버지도 어린이날에는 그때를 분명히 생각하실 테니

그날만은 엄마도 술 취하지 마시고 울지도 마시고 그때만 생각해 주신다면

5월은 진짜 내 세상이 될 것 같다고 썼어요.

예수님, 그날 제가 1등 상 타고 얼마나 기뻐했는지도 아시지요?

바로 그날, 엄마는 너무 아파서 술도 못 드시고 울지도 못하셨어요.

며칠 후 뜻밖의 손님이 찾아오셨어요.

글짓기 대회 날 심사위원장을 맡으셨던 동화작가 할아버지께서

물어 물어 우리 집에 찾아오신 거예요.

대접할게 없다고 할머니는 동네 구멍가게에 급히 내려가셔서

사이다 한 병을 사 오셨지요.

동화작가 할아버지는 엄마에게 똑똑한 아들을 두셨으니

힘을 내라고 위로해 주셨어요.

엄마는 눈물만 줄줄 흘리시면서 엄마가 일나가시는 술집에 가시면

약주라도 한 잔 대접하겠다고 했어요.

동화 할아버지는 대접은 이 다음에 받겠다고 하시면서

할아버지가 쓴 동화책 다섯 권을 놓고 가셨어요.

밤 늦게까지 할아버지께서 지으신 동화책을 재미있게 읽던 저는

그만 깜짝 놀랐어요.

동화책 갈피에서 흰 봉투 하나가 툭 떨어지는 게 아니겠어요?

펴 보니 저는 생전 처음보는 수표였어요.

엄마에게 보여드렸더니 엄마는 “세상에 이럴수가…” 하시며

제 양 어깨를 꽉 잡고

“고마우신 분이야. 세상에 아직도 이런 분이 계시는구나.”하셨어요.

저는 마음 속으로

‘할아버지께서 가지고 오셨지만 예수님이 주신 거예요’라고 생각했는데

엄마도 그런 내 맘을 알아채셨는지

“얘, 용욱아, 예수님이 구 원만 주신 게 아니구 50만 원을 주셨구나.”

큰 소리로 말씀하시면서 울음을 터트렸어요.

할머니도 울고 저도 눈물이 났어요.

동생 용숙이도 괜히 따라 울면서

“오빠, 그럼 우리 안 쫓겨나구 여기서 살아도 되는 거야? 했어요.

너무나 신기한 일이 주일에 또 벌어졌어요.

엄마가 주일 아침, 교회에 가시겠다고 화장을 엷게 하고 나선 것이었어요.

그리곤 대예배에 가셔서 얼마나 우셨는지

두 눈이 솔방울만 해 가지고 집에 오셨어오.

나는 엄마가 우셨길래

또 같이 죽자고 하시는 게 아닐까 덜컥 겁이 났는데,

“용욱아, 그 할아버지한테 얼른 편지 써라.

엄마가 안 죽고 살아서 전세금은 꼭 갚아 드리겠다구.

난 못 죽어, 인제!” 하셨어요.

엄마가 안 죽겠다는 맘을 먹으신 게 저는 너무나 기뻐서

‘얏호!’ 소리를 지를 뻔 했어요.

고마우신 예수님!

참 좋으신 예수님! 감사합니다.

할아버지께서 사랑으로 주신 수표는

저도 이담에 커서 꼭 갚아 드리고 싶어요.

그러니까 제가 어른이 될 때까지

동화 할아버지께서 건강하게 살아 계시도록 예수님께서 돌봐 주세요.

그것만은 약속해 주세요.

예수님!

너무나 좋으신 예수님!

이 세상 최고의 예수님을 용욱이가 찬양합니다.

예수님을 사랑합니다."

- 용욱이 올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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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사진]

벌집 모양으로 다닥다닥 붙어있다고 해서 속칭 '벌집촌'으로 불리는 구로구 일대 쪽방촌. 방한칸과 부엌을 합쳐 3-4평에 불과한 이 공간에서 2-4명 가량이 살고 있다.

[출처] 낮은울타리 1991년 5월호

[설명]

위 '용욱이의 편지글'은 1991년 5월호에 기독교 잡지 '낮은울타리'에 최초로 실렸다.

이 글은 '난 못죽어 인제'라는 제목으로 실렸는데, 당시만 해도 창간된 지 얼마 안되었던 이 잡지에 실린 용욱 군의 글은 큰 파장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러던 1999년 1월 '낮은 울타리' 편집국은 100호특집 기념으로 그 동안 실렸던 글 중 좋은 글을 선별해 특집호에 실었고, '난 못죽어 인제'도 그에 포함됐다.

이후 2001년경 위 글은 '용욱이의 편지'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을 통해 이슈화되면서 많은 이에게 감동을 주었고, 서울의 한 초등학교에서는 '훈화시간'에 위 글을 들은 한 초등 여학생이 만원짜리 한장과 5천원짜리 문화상품권을 구로초등학교에 보내기도 했다.

1999년 특집호에 용욱이의 편지를 게재했던 <낮은울타리>의 서정희 편집국 차장은 "10년 전에 편집국에서 일했던 직원은 현재 한 명도 남아 있지 않아 어떤 경위로 1991년에 그 글이 실렸는지 알수 없다"고 말했다.

2022년 5월 현재 위 "용욱이의 편지"는 뮤지컬로 제작되어 공연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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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넴 스킨으로 변경

blog 2023. 9. 28. 17:26

기존 스킨이 글자가 작어서 보기에 점점 불편해져서 여러 스킨을 고려하다가 미넴 스킨으로 변경하였다.

적용한 버전 : Mynem Skin V2.7.3

 

관련 링크 :

https://sangminem.tistory.com/506

 

티스토리 무료 최강 미넴 스킨 소개 및 설치 방법

기본 제공 스킨을 나름대로 고쳐 쓰다가 만족하지 못하고 그냥 새로 만들었습니다. 여태까지 블로그를 하면서 적용한 많은 기능들을 대부분 포함하였으니 누군가에게는 상당히 유용한 스킨이

sangminem.tistory.com

위 링크에서 설명한 플러그인 4개도 설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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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기할 것 : 일본의 핵오염수 방류는 최소 30년 계획
  그런데, 30년후에 다른 문제가 안 생길려나? 그래서 최소라는 단어를 사용한 듯.

 

어떻게 기계가 30년동안 사용하면서 문제가 없을 수 있을까?
만약 문제가 생기면 오염수는 그냥 나오게 되네...

 

일본의 ALPS(다핵종제거설비) 는 최근 10년동안(2013~202) 총 30"건"이 넘는 고장이 발생했다는 기사가 있다.

근거 : m.sstpnews.com/news/view/1065605741576364

 

일본 ALPS 고장사실 은폐·축소 ... 정부, 알고도 눈 감았나?

▲박구연 국무 1차장 (사진=연합뉴스) 지난 10년간 알프스 주요 고장 사례가 8건이라던 ...

m.sstpnews.com

 

일본 ALPS 고장에 대한 또다른 기사 : https://www.hani.co.kr/arti/society/environment/1096976.html

 

일 오염수 처리시설 고장 8건?…“필터 24개 고장을 1건으로”

정부 발표 8건은 원인별로 묶은 사례 건수현장 시찰 참여 전문가, 일일브리핑서 밝혀

www.hani.co.kr

 

일본의 ALPS 처리 결과 측정방식에 문제를 제기하는 미국 교수의 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xFgh-fdgx2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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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암기할 것 : 일본 방사능 오염수 해양 방류(2023/8/24일)

 

2023년 9월 28일 오늘 일본 홈페이지에 들어가서 확인한 내용. 
(영문 페이지도 동일 내용임)

ALPS 처리수를 측정하여 결과를 보는데는 약 3개월이 걸리는 것 같다.
다른 말로 하면, 지금 ALPS가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오염수가 그냥 방류되어도 우리는 3개월 후에나 알 수 있네.

 

위 문서를 아래에 첨부함 (국문 파일과 영문 파일로)

measurement_confirmation_230921-e.pdf
0.11MB
measurement_confirmation_230921-ko.pdf
0.21MB


위 문서로 들어가는 링크 : https://www.tepco.co.jp/ko/decommission/progress/watertreatment/index-kr.html
- 방법 : 아래 그림들에서 V 위치를 클릭하여 들어가면 됨.

 

 

Posted by 세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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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mois.go.kr/frt/sub/popup/p_taegugki_banner/screen.do

 - 아래는 그림임. 위의 링크를 클릭하기 바람
 - 국가상징 어린이 홈페이지 :  링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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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사용중인 국새
(이 블로그에 그림이 없는 게시글의 아이콘은, 이 국새 그림이 보이게 했음)

국새의 명칭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印章)의 명칭은 새(璽), 보(寶), 어보(御寶), 어새(御璽), 옥새(玉璽), 국새(國璽)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져 왔다. 여기서 새(璽), 보(寶)는 나라의 인장(印章)의 뜻을 지니고 있으며, 어보(御寶), 어새(御璽)는 시호, 존호 등을 새긴 왕실의 인장을 뜻하는 말이다. 옥새(玉璽)는 재질이 옥으로 만들어졌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으로, 현대적 의미에서 국가를 상징하는 인장의 이름으로는 국새(國璽)라고 표기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고 할 수 있다.

국새의 의미

국새는 국사(國事)에 사용되는 관인으로서 나라의 중요문서에 국가의 상징으로 사용된다. 그러므로 국새는 국가 권위를 상징하며, 그 나라의 시대성과 국력, 문화를 반영하는 상징물이다. 국권의 상징인 국새가 가진 불가침의 권위와 신성성은 다소 퇴색하였으나, 오늘날에도 국새의 상징적 의미는 그대로 존재한다. 정부에서는 헌법 개정 공포문의 전문, 대통령이 임용하는 국가공무원의 임명장, 외교문서, 훈장증 등 국가 중요문서에 지금도 국새를 사용하고 있다. 국새는 동양(한국, 일본 등)에서는 인장의 형태로, 서양(미국, 영국, 프랑스 등)에서는 압인의 형태로 주로 사용되고 있으며, 그 사용처는 우리나라의 경우와 유사하다.

출처 : mois.go.kr/frt/sub/a06/b08/nationalIcon_5_3/screen.do (행정안전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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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는 나이스에서 발급했었는데, 이젠 정부24에 발급할 수 있다.

https://www.gov.kr/mw/AA020InfoCappView.do?HighCtgCD=A04001&CappBizCD=13410000017&tp_seq=01

지금 나이스에 들어가면, 정부24에서 발급받으라고 팝업 알림창이 뜸. //23.9.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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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https://blog.naver.com/skkim3378/222161498616

 

학력고사 본지 이제 햇수로 31년 (1989년 12월 치뤄진 1990년 대학 입시)

네이버에서 퍼왔어요

네이버에서 퍼왔어요

 

1990년도, 90학번을 위한 대학 학력고사.

이때가 1989.12.15(금) 이라네.

이게 벌써 31년이 흘렀다.

당시 시험은 선지망 후지원.

즉 성적이 나온후 대학을 선택해서 가는게 아니라, 대학 학과를 선택해서 지원한후 시험을 보게되는것.

즉 시험 보기전에 학교 학과를 정해놓고 그 경쟁률을 알고 시험을 보는것.

고사장은 대학건물 또는 대학에서 지정한 중고교에서 시험을 봤다.

경쟁률이 낮은 학교 & 학과를 가기위해 막판 경쟁률은 장난 아니었음. 일단 붙어보자는 식..

89학번 90학번 91학번이 가장 대학 경쟁률이 높았고 그중 90학번이 가장 높았다고 알고 있다 1971년생 ㅎㅎ

1990 입시 전체경쟁률이 3.6 : 1 정도로 기억한다.

그때는 전기, 후기가 있었는데 12월 전기 시험에 떨어지면 1월 후기시험을 많이 봤고 마찬가지로 전기와 같은 선지망 후지원 같은 과정을 겪어야했다.

후기시험을 모집하는 대학과 학과는 줄어들고 전기에 떨어진 학생들이 재수를 하지 않기위해 몰렸으므로 중상위권 대학의 경쟁률이 엄청 셌다.

대학들중 일부 학교는 전후기분할로 인원을 뽑았는데, 예를 들어 정원이 100명이면 전기 30명 또는 50명, 후기 70명 또는 50명등의 예로 뽑는 학교들이 있었다.

문과에서는 전기 SKY 등등에서 떨어진 학생들이 많이 몰리는 성균관대, 한양대, 중앙대, 외대 등등이 후기때 경쟁률, 점수도 높았었다.

그때 전기 시험을 떨어지고 후기로 들어가서 그때 기억이 많이 난다.

시험은 문과 이과 공통 340점

- 문과는 국어 I, II 75, 수학 I 55, 영어 60, 국사 25, 윤리 25, 사회(사회, 지리, 세계사중) 2과목 선택 40, 과학(생

물, 지구과학, 화학, 물리중) 1과목 선택 20, 외국어 또는 공업중 선택 20, 체력장 20

- 이과는 국어 I 55, 수학I, II 75, 영어 60, 국사 25, 윤리 25, 사회(사회, 지리, 세계사중) 1과목 선택 20, 과학(생

물, 지구과학, 화학, 물리중) 2과목 선택 40, 외국어 또는 공업중 선택 20, 체력장 20

당시 신림동에 살고 있었는데 가까운 대학인 서울대는 당연히 어려워 한강을 넘어 강북으로 시험보러 가야했다.

아부지가 아침에 차로 바래다 주셨는데 엄청나게 추웠던 기억이다. 돌아가신 아부지 생각나네.

지금은 수능으로 바뀌었지만 그때 생각이 아직도 난다.

전기 시험 끝나고 채점을 하는데 긴장을 해서인지 실수도 많이 했고 점수가 너무 안나와서 그때 당시 정말 마음이 아팠었다.

1교시 국어 국사를 너무 못봤던 기억, 1교시 망치니 그 다음 시간도 줄줄이 ㅎㅎㅎ..

시험은 참 어려운것 !

아들은 내년에 수능인데 본인이 알아서 한다고 하니 이젠 공부하라고 얘기 안한다 ㅎㅎ

요즘 애들은 우리때보다 공부하라고 하는거 더 싫어하는듯. 이제 1년 남았으니 열심히 했으면 하는 마음.

오늘 시험 보는 학생들 코로나 때문에 정말 힘든 해 였는데 결실 있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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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그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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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할 링크:
https://zi-c.tistory.com/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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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법 : Options - General에서 아래 항목을 체크하면 됨.

 완성된 모습 :

everything version : 1.4.1.1023 (x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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